경전

전경

행록 4장 1절
 경석(京石)의 아우 윤경(輪京)이 구릿골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와서 배알하는도다. 상제께서 “천지에서 현무가사를 부르니 네 형의 기운을 써야 할지니 네 형에게 구설인후(口舌咽喉)를 움직이지 말고 동학의 시천주(侍天呪)를 암송하되 기거동작에 잠시도 쉬지 말게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행록 4장 2절
 안 필성이 상제를 모시기를 기뻐하여 종종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어느 날 그가 동곡(銅谷) 앞 팥거리에서 상제를 만나 대접하려고 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뜻을 알아차리시고 “내가 반찬을 마련하리라” 하시고 못을 휘어서 낚시를 만들어 팥거리 근처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던지시니 잉어와 가물치가 걸렸도다. 이것으로써 반찬을 만들어 잡수시면서 필성과 함께 한때를 보내셨도다.
행록 4장 3절
 상제께서 장 성원(張成遠)에게 글을 써서 봉하여 주시면서 훗날에 보라고 이르셨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도다.
 將驕者敗 見機而作
행록 4장 4절
 하루는 김 송환(金松煥)이 상제께 여쭈기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나이까.” 상제께서 “있느니라”고 대답하시니라. 또 그가 여쭈기를 “그 위에 또 있나이까.” 상제께서 “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도다. 이와 같이 아홉 번을 대답하시고 “그만 알아두라”고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후일에 그를 만사불성(萬事不成)이라 평하셨나니라.
행록 4장 5절
 상제께서 김 송환에게 시 한 수를 외워 주셨도다.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石上梧桐知發響 音中律呂有餘和
 口傳三代詩書敎 文起春秋道德波
 皮幣已成賢士價 賈生何事怨長沙
행록 4장 6절
 상제께서 무신년 초에 본댁에서 태인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물고 계신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기 때문이었나니라. 그곳에 신 경원(辛京元)ㆍ최 내경(崔乃敬)ㆍ최 창조(崔昌祚)ㆍ김 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도다.
행록 4장 7절
 어느 날 상제께서 식사 시간이 지나서 최 창조의 집에 이르셨도다. 그의 아내는 상제께서 드나드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노라. 이날도 밥상 차리기를 싫어하는지라. 상제께서 창조에게 가라사대 “도가에서는 반드시 아내의 마음을 잘 돌려 모든 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순종하여야 복되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아내가 문밖에서 엿듣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 듯이 살피심에 놀라 마음을 바로 잡으니라.
행록 4장 8절
 상제께서 최 창조의 집에서 종도 수십 명을 둘러앉히고 각기 세 글자씩을 부르게 하시니라. 종도들은 천자문의 첫 글자부터 불러오다가 최 덕겸(崔德兼)이 일(日) 자를 부를 때 상제께서 말씀하시니라. “덕겸은 일본왕(日本王)도 좋아 보이는가보다” 하시며 “남을 따라 부르지 말고 각기 제 생각대로 부르라” 이르시니라. 이튿날 밤에 상제께서 덕겸으로 하여금 담뱃대의 진을 쑤셔 내되 한 번 잡아 놓치지 말고 뽑아서 문밖으로 버리게 하시니 그는 말씀하신 대로 진을 바깥에 버리자 온 마을의 개가 일시에 짖는도다. 덕겸이 신기하게 느껴 “어찌 개가 일제히 짖나이까”라고 여쭈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대신명(大神明)이 오는 까닭이니라.” 그가 “무슨 신명이니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시두손님이니 천자국(天子國)이라야 이 신명이 들어오나니라”고 일러 주셨도다.
행록 4장 9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보림면 장재동을 지나는 길가에서 묘(墓)를 보시고 공우에게 이르시니라. “이 혈(穴)은 와우형(臥牛形)이나 금혈형(琴穴形)이라고 불리우니라. 그것은 혈명을 잘못 지어서 발음(發蔭)이 잘못되었느니라. 어디든지 혈명을 모르거든 용미(龍尾) 없이 조분(造墳)하였다가 명사에게 혈명을 지은 뒤에 용미를 달면 발음이 되나니라” 하셨도다.
행록 4장 10절
 종도들이 二월의 따뜻한 어느 날 상제와 함께 보리밭 길을 지날 때 “이 세상에 빈부의 차별이 있는지라. 곡식 중에 보리가 있어 그것을 먹을 때마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 보리를 없애야 먹는 데에나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리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니라. 상제께서 이야기를 수긍하시는 태도를 취하셨도다.
행록 4장 11절
 상제께서 전주 김 준찬(金俊贊)의 집에 가셔서 김 덕찬(金德贊)ㆍ김 준찬(金俊贊)ㆍ김 낙범(金落範)들과 좌석을 함께 하시다가 가라사대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고 알리셨도다.
행록 4장 12절
 덕찬은 백지 한 장에 칠성경을 쓰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에 그 글과 모양의 크고 작음을 여쭈었더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의 뜻대로 쓰라” 하시므로 덕찬이 양지 한 장에 칠성경을 가득 차게 쓰고 나니 끝에 가서 석 자 쓸 만한 곳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그 여백에 칠성경(七星經)이라고 석 자를 쓰신 후 불사르셨도다.
행록 4장 13절
 상제께서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에 이르시니라. 도중에서 상제와 그는 한 장군이 갑주 차림에 칼을 짚고 제비산 중턱에 서 있는 것을 보았도다. 상제께서 구릿골에 이르셔서 김 준상(金俊相)의 집에 머무시니라. 어떤 사람이 김 준상을 잡으려고 이 밤에 구릿골에 온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전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태연히 계시다가 저녁 무렵에 형렬의 집으로 가시니라. 여러 종도들이 준상의 집에서 잠자는데 공우는 뒷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던 터에 원평(院坪) 쪽으로부터 등불을 가진 사람 대여섯이 구릿골을 향하여 오다가 선문(旋門)에 이르렀을 때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되돌아가 종도들을 깨워서 함께 피신하려고 하나 곤히 잠든 사람들이 좀처럼 깨지 않았도다. 그러나 한 식경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그는 잠에 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그에게 “대장은 도적을 잘 지켜야 하나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14절
 상제께서 공우에게 가라사대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터이니 나의 말을 믿을지어다. 너는 광인이 되지 못하였으니 농판으로 행세함이 가하니라” 하시니라.
행록 4장 15절
 四월에 들어 심한 가뭄으로 보리가 타니 농민들의 근심이 극심하여지는도다. 종도들도 굶을 걱정을 서로 나누니 상제께서 “전일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는 일은 농담 한 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퍼지니 이후부터 범사에 실없이 말하지 말라”고 꾸짖으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전주 용머리 고개 김 낙범에게 들러 거친 보리밥 한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보고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고 하시면서 다 잡수셨도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큰 비가 내리니 말라죽던 보리가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도다.
행록 4장 16절
 상제께서 四월 어느 날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을 받고 계셨는데 전에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돈 열 냥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시자 그는 무례하게 상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 열 냥을 빼앗아 갔도다. 이 방약무인을 탄식하시고 상제께서 그를 한탄하셨도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다시 전주에서 서신으로 돈을 청하여 오니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돈 열 냥을 구하여 보내시니라. 며칠 지낸 뒤에 정 순검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맞아 죽으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오” 하시고 다시 한탄하셨도다.
행록 4장 17절
 무신년 四월 어느 날 또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 하셨도다.
행록 4장 18절
 상제께서 전주 불가지(佛可止) 김 성국(金成國)의 집에 가 계실 때의 어느 날 김 덕찬을 불러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들었도다.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이제 용소리 김 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는 명을 좇아 용소리로 떠나느니라. 그가 김 의관의 집 근처에서 취한으로부터 심한 곤욕을 당하고 불가지로 돌아오니라. 상제께서 문 바깥에 나와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물으시니라. 덕찬이 공연히 보내어 봉변만 당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도다. 상제께서 덕찬과 함께 방안에 들어오셔서 술을 권하며 가라사대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 하시니 그는 상제를 두려워하니라. 그 후부터 덕찬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언행을 삼갔도다. 상제께서 두 달 동안 용소리 시목정(龍巢里柿木亭)에 계시면서 이곳저곳의 종도들의 집에 다니셨도다.
행록 4장 19절
 손 병욱(孫秉旭)은 고부 사람인데 상제를 지성껏 모셨으나 그의 아내는 상제의 왕래를 불쾌히 여기고 남편의 믿음을 방해하였도다. 어느 날 병욱의 아내가 골절이 쑤시고 입맛을 잃어 식음을 전폐하여 사경에 헤매게 되었느니라. 공우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제께 아뢰면 고쳐 주시리라고 믿었도다.
행록 4장 20절
 그 후 어느 날 공우가 정읍에 가서 상제를 모시고 와룡리(臥龍里) 네거리에 이르렀도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회룡리(回龍里)가 있고 이곳에 신 경수(申京洙)가 살고 서북쪽 교동에 황 응종(黃應鍾)이 살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네거리 복판에서 공우에게 “어디로 가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시니 공우가 “저희 집으로 가시옵소서” 하고 청하니 상제께서 세 번이나 되물으시므로 공우도 세 번 한결같이 대답하니라. 그러나 상제께서 먼저 응종의 집에 들르셨다가 곧 공우를 데리시고 병욱의 집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병욱에게 돈 서돈을 청하시기에 그가 올리니 그것을 공우에게 간수하게 하시고 또 두 냥을 병욱으로부터 받아서 다시 그에게 그것을 갈무리하게 하신 후에 병욱의 아내를 불러 앞에 앉히고 “왜 그리하였느냐”고 세 번 되풀이 꾸짖고 외면하시면서 “죽을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혼자 말씀을 하시니라. 병욱이 상제께 공양할 술을 준비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나 먹을 술은 있으니 준비하지 말라” 이르시니라. 병욱의 장모가 상제께서 오신 것을 알고 술과 안주를 올리니 상제께서 그 술을 드셨도다.
 응종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구릿골로 행차하셨도다. 가시는 도중에 공우에게 “사나이가 잘 되려고 하는데 아내가 방해하니 제 연분이 아니라. 신명들이 없애려는 것을 구하여 주었노라. 이제 병은 나았으나 이 뒤로 잉태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과연 그 후부터 그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였도다.
행록 4장 21절
 김 병계(金炳啓)가 열여섯 살 때 손바래기 앞에 있는 초강(楚江)의 들판 길로 오다가 진창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상제께서 손바래기로 오시던 길에 이것을 보고 뛰어들어 그 아이를 팔에 꼭 끼고 쏜살같이 들을 건너 손바래기에 이르셨도다. 상제께서 병계를 데리고 본댁에까지 가셔서 모친을 뵈었도다. 새 버선을 갈아 신으려는데 그것이 쭉 찢어지기에 다른 새것을 한 손으로 신으셨도다. 그리고 부엌에 걸려 있던 쇠고기를 모두 회로 만들어 잡수신 후에 병계를 보고 그놈 쓸 만한 줄 알았더니 하시고 돌려보내시니 그제서야 그 아이는 허둥지둥 돌아가니 이 아이가 나중에 덕천 면장이 되었도다.
행록 4장 22절
 훗날에 윤경이 상제를 찾아뵈옵고 고부인(高夫人)과 희남(熙南)의 병세를 알리니라. 소식을 듣고 상제께서 “내일 살포정에 가서 나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윤경은 이튿날 살포정으로 갔으나 상제를 뵈옵지 못하여 바로 태인 소퇴원 주막으로 가니라. 주막 주인이 윤경의 물음에 “선생님께서 윤경을 새울로 보내라”고 전하니 그는 새울로 떠나가니라.
 그는 도중에서 일병 수백 명을 만나 검문을 받았으나 가환으로 의사를 모시러 가는 길이라고 알리니 저희들이 모두 물러가는도다. 윤경이 새울에 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오늘은 병세가 어떠냐”고 물으시니라. 윤경이 “집에서 일찍이 떠났으므로 잘 모르나이다”고 아뢴즉 상제께서 “네가 무엇하러 왔느냐”고 꾸짖으시니 윤경은 몸 둘 바를 모르더라. 이날 밤에 상제께서 윤경으로 하여금 밤이 새도록 문밖을 돌게 하셨도다. 윤경이 졸음을 달래면서 돌고 있는 중에 첫닭이 울더니 상제께서 문밖으로 나오셔서 “네가 졸리지 않느냐”고 물으시기에 윤경이 “졸리지 아니하나이다”고 여쭈니 “그럼 나와 함께 백암리(白岩里)로 가자”하시고 길을 떠나시니라. 김 자현도 따라 백암리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다시 정읍으로 갔도다. 상제께서 일행을 앞세우기도 하고 뒤에 따르게도 하시면서 얼마동안 가시다가 “일본 사람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정읍 노송정(老松亭)에 이르셨을 때 “좀 지체하였다가 가는 것이 가하다” 하시고 반 시간쯤 쉬시니라. 일행은 노송정의 모퉁이에 있는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일본 기병이 이곳으로 오다가 이곳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간 많은 말 발자국을 보았도다. 이때 상제께서 “대인의 앞길에 저희들이 어찌 감히 몰려오리오”라고 외치셨도다. 옆에 있던 윤경이 행인으로부터 수십 명의 일본 기병이 이곳에 달려왔다가 딴 곳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라. 상제께서 대흥리에 이르셔서 고부인과 희남의 병을 돌보시니라. 그들은 병에서 건강한 몸을 되찾았도다.
행록 4장 23절
 상제께서 무신년 어느 날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였도다.
행록 4장 24절
 이 대답을 듣고 상제께서 글 한 수를 지으셨도다.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
행록 4장 25절
 그리고 고부인에게 다시 가라사대 “내가 없으면 여덟 가지 병으로 어떻게 고통하리오. 그 중에 단독이 크리니 이제 그 독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부인의 손등에 침을 바르셨도다.
행록 4장 26절
 다시 “크나큰 살림을 어찌 홀로 맡아서 처리하리오”라고 말씀을 하시니 고부인은 상제께서 멀리 외방으로 출행하시려는 것으로 알았도다.
행록 4장 27절
 六월에 이르러서도 가뭄이 계속되어 곡식이 타 죽게 됨에 김 병욱이 김 윤근(金允根)으로 하여금 상제께 이 사정을 전하게 하니라.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덕찬에게 그의 집에서 기르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고 종도들과 함께 그것을 잡수셨도다.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윤근은 “선생이 곧 만인을 살리는 상제시니라”고 고백하였도다.
행록 4장 28절
 六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백 남신(白南信)의 친묘를 파고 두골을 훔쳐갔도다. 김 병욱이 사람을 보내어 상제께 이 소식을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촛불을 밝히시고 밤을 새우기를 초상난 집과 같이 사흘을 지내시고 난 후 남신에게 “두골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한적한 곳에 거처하되 다른 사람의 왕래를 끊고 기다리면 처서절에 그 도적이 두골을 가져오리라”고 전하게 하시니라. 남신은 백운정(白雲亭)에 거처하면서 명을 좇으니라. 七월에 접어들면서 친산의 아래 동리의 어른이 마을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친산 밑에 사는 사람으로서 굴총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두루 찾고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묘주의 상을 후하게 주기로 결의하였느니라. 마을 사람들이 각방으로 찾는 도중에 두골을 가지고 마을 어른을 찾는 동리 한 사람이 나타난지라. 그 어른이 이 사람을 데리고 백운정에 있는 묘주를 찾으니라. 그날이 곧 처서절이었도다. 그런데 두골을 찾았다는 자가 도적의 누명도 벗고 상도 탈 욕심으로 동리의 어른을 찾았도다.
행록 4장 29절
 병욱이 용두치(龍頭峙) 주막에 계시는 상제를 찾아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그 도적을 어떻게 하려느냐”고 물으시므로 병욱이 “이미 경무청에 보냈나이다”고 여쭈니 가라사대 “사람을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일이거늘 어찌 그렇게 하였느뇨. 속히 푸른 의복 한 벌을 지어 오라.” 병욱이 명하심을 남신에게 전하니 남신은 푸른 의복 한 벌을 상제께 올렸도다. 상제께서 그 옷을 불사르시고 “이것으로써 그 사람을 징역에나 처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니라.
 훗날에 종도들이 처서날에 찾게 된 연유를 여쭈어 보았더니 “모든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 두면 도수에 따라서 공사가 다 풀리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30절
 차 경석이 상제를 섬긴 후부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아 집안 형편이 차츰 기울어져 가니라. 그의 아우 윤칠이 “선생을 따르면 복을 받는다더니 가운이 기울기만 하니 허망하기 짝이 없소이다. 직접 제가 선생을 뵈옵고 항의하리이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상제를 만나러 가는 중로에서 큰 비를 만나 옷을 푹 적시고 동곡에 이르러 상제를 뵈온지라. 상제께서 그를 보시고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이 부근에 의병이 자주 출몰하기에 관군이 사방을 수색하고 있는 중인데 너의 비를 맞은 행색을 보면 의병으로 오인하고 너에게 큰 화난이 닥치리니 어서 다른 곳에 가서 숨었다가 부르거든 나오라” 이르시고 그를 다른 곳에 숨게 하셨도다.
 그리고 형렬에게 윤칠을 오게 하고 그를 만나 돈 석 냥을 그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수일 후에 정읍으로 갈 터이니 네가 빨리 가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시니라. 윤칠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니라. 수일 후에 상제께서 고부 와룡리에 가셔서 경석에게 사람을 보내어 고부 학동(學洞)으로 오라고 전하게 하셨도다. 경석이 전하여 듣고 이튿날 황망히 학동에서 상제를 뵈오니 가라사대 “내가 윤칠이 두려워서 너의 집으로 가기 어려우니 이 일극(一極)을 가져가라” 하시고 돈 열닷 냥을 주시니 경석이 돈을 받아들고 여쭈기를 “무슨 일로 그렇게 엄절하신 말씀을 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일전에 윤칠이 동곡에 온 것을 보니 살기를 띠었는데 돈이 아니면 풀기가 어려우므로 돈 석 냥을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느니라”고 알려주셨도다.
행록 4장 31절
 상제께서 인사를 드리는 김 갑칠(金甲七)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시니 그는 “가뭄이 심하여 아직까지 모를 심지 못하여 민심이 매우 소란스럽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시니라. 갑칠은 발병 때문에 과히 좋아하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눈치를 차리시고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서 어찌 일각을 지체하리오” 하시고 가기를 독촉하시니라. 갑칠이 서둘러 돌아가는 길에 원평에 이르러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도다. 잠깐사이에 하천이 창일하여 나무다리가 떠내려가게 되니라.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는도다. 흡족한 비에 모두들 단숨에 모를 심었도다.
행록 4장 32절
 상제께서 무신년 七월에 구릿골 약방에 계실 때 양지에 글을 쓰시더니 전 간재(田艮齋)의 문도(門徒) 五ㆍ六명이 대립(大笠)을 쓰고 행의를 입고 나와서 “선생님 뵈옵겠습니다” 하며 절을 하기에 상제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로다” 하시며 절을 받지 아니하시니 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섰다가 물러갔도다.
행록 4장 33절
 또 한번은 음양(陰陽) 두 글자를 써서 약방 윗벽에 붙이고 그 위에 백지를 덧붙이고 “누가 걸리는가 보라” 하시니라. 한참 후에 “나약한 자가 걸렸다”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4장 34절
 또 어느 날 낙양의 들 근방을 지나실 때 황소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다가가서 뿔을 두 손으로 하나씩 잡고 소귀에 무슨 말씀을 이르시니 소들이 흩어져 가는도다.
행록 4장 35절
 상제께서 여러 종도를 데리고 익산리를 거쳐 나루터에 이르시니 사공은 없고 빈 배만 있는지라. 상제께서 친히 노를 저어 건너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시니라. 종도들이 우러러보니 이상한 서운이 노를 저어 하늘을 건너가는 모양을 이루었도다.
행록 4장 36절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상제께서 김 병욱의 집에 들르시니 종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도다. 병욱이 아내에게 점심 준비를 일렀으되 아내는 무더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면서 혼자 불평을 하던 차에 갑자기 와사증에 쓰러지는지라. 이 사정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는 그 여인의 불평이 조왕의 노여움을 산 탓이니라” 하시고 글을 써서 병욱에게 주시면서 아내로 하여금 부엌에서 불사르게 하셨도다. 아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서 그대로 행하니 바로 와사증이 사라졌도다.
행록 4장 37절
 무신년 여름에 문 공신이 동곡에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라. 그 자리에서 상제께서 그를 보고 “네가 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면 앞날에 난경이 닥쳐오리라”고 꾸짖고 타이르셨도다.
행록 4장 38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공신에게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 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三百六十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 九ㆍ十월 세단풍(細丹楓) 바람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더라”는 시조 한 수를 외워주셨도다.
행록 4장 39절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머물고 계시다가 동곡에 이르셨도다. 한 공숙(韓公淑)이 어느 날 상제를 배알하러 온지라. 상제께서 그와 술을 나누시다가 “일을 많이 하였도다”고 말씀을 건네시면서 친히 술을 따르셨도다. 그는 황송하여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하시나이까. 하여 드린 바가 없사옵니다”고 여쭈면서 받은 잔을 마셨도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지난 밤 꿈을 꾸었나이다”고 여쭈는지라. 그 말을 상제께서 받으시고 “일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하노라”고 가르치시니라.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이 모두 공숙의 꿈을 궁금하게 여기는지라. 공숙이 “상제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천하 호구(戶口)를 성책(成冊)하여 오라 명하시기에 오방신장을 불러서 성책하여 상제께 올렸나이다”고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도다.
행록 4장 40절
 상제께서 하루는 공우(公又)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공우에게 우산을 사서 들게 하셨도다.
 공우는 상제께서는 원래 우산을 받는 일이 없었고 비록 비오는 날 길을 가실지라도 비가 몸에 범하는 일이 없었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더니 뜻밖에 비가 오는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우산을 받으라 하시니 공우는 상제께 받으시길 청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함께 비를 맞아 옷이 흠뻑 젖으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뒤로는 우산을 들지 말라. 의뢰심과 두 마음을 품으면 신명음호를 받지 못하나니라”고 하셨도다.
행록 4장 41절
 상제께서 어느 날 차 경석ㆍ김 광찬ㆍ황 응종을 앞에 세우고 공우에게 몽치를 들게 하고 윤경에게 칼을 들리고 “너희가 이 이후에도 지금의 스승을 모시고 있듯이 변함이 없겠느냐. 변함이 있으면 이 몽치더수구니를 칠 것이오. 이 칼로 배를 가를 것이니라”고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시기도 하셨다.
행록 4장 42절
 또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르시니라. “옛적에 한 농부가 농한기인 이른 봄에 쉬지 않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 논에 수원지의 물이 잘 들어오도록 봇돌을 깊이 파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고 공연한 노력이라고 비소하더니 이해 여름에 날이 무척 가물어 그 들판이 적지가 되었으나 봇돌을 파 놓은 그 농부는 아무 근심 없이 물을 대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으니 이런 일을 명심해 두라” 하셨도다.
행록 4장 43절
 상제께서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초목 중에 一년에 자라는 것에 무엇이 제일 많이 자라느뇨” 물으시니 종도들이 “대(竹)”라고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그 기운이 만물에 특장하니 감하여 쓰리라” 하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이 해의 대는 잘 자라지 않았도다.
행록 4장 44절
 이해 가을 어느 날 상제께서 안 내성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의 향화와 봉친 육영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시도다.
행록 4장 45절
 상제를 뵈옵고 인사(人事)를 묻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그런 사람을 대하실 때마다 당사자와 심부름으로 온 사람과의 관계를 물으시니라. 일가나 친척이 되지 않으면 그 부형과의 관계를 물으시고 아무 관계가 없으면 “관계없는 사람이 어찌 왔느뇨” 하시면서 돌려보내시곤 하셨도다.
행록 4장 46절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공신을 대동하고 고부로 가시다가 행로에 “아는 벗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운산리(雲山里)에 신 경수가 있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상제께서 공신의 인도로 경수의 집에 들르셔서 마루에 앉아 글을 써서 불사르고 공신에게 집에 다녀오게 하셨도다. 공신이 집에 가니 일진회의 간부 송 대화(宋大和)가 와 있도다. 공신은 대화를 치송하고 운산리에 되돌아오니 상제께서 “있더냐”고 물으시기에 그는 “예. 그가 있어서 치송하였나이다”고 대답하였도다.
행록 4장 47절
 이후에 백암리에서 상제를 박 공우와 신 원일이 모시고 있었도다. 이때 종도 김 경학의 천거로 김 영학(金永學)이 상제를 배알하였을 뿐 상제께서 이레 동안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도다. 영학이 매우 불만을 품기에 공우와 원일이 그에게 “그대가 상제께 삼가 사사하기를 청하면 빨리 가르쳐 주시리라”고 일러주니 그때야 그는 사사하기를 청하니 상제로부터 승낙을 얻었느니라. 그런데 상제께서 갑자기 그를 꾸중하시는도다. 영학은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문밖으로 나가니라. 상제께서 영학을 불러들여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신을 물리쳐 내려 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도다. 영학이 “무슨 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되물은즉 “너는 열여덟 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회상을 촉구하시니 그는 옛일을 더듬었도다.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南原)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그에게 화로를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三월에 죽었나이다. 또 금년 봄에 장성(長城) 다동(多洞)에서 사는 외숙인 김 요선(金堯善)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여 의병대장 김 영백(金永白)을 장성 백양사(長城白羊寺)로 찾아가서 그 비행을 꾸짖으니 그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그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나이다”고 영학이 이 두 가지 일을 아뢰었도다.
행록 4장 48절
 종도들이 때때로 부자를 종도로 천거하면 상제께서 이것을 제일 괴로워하시니라. 종도들이 천거한 부자가 상제를 찾아오면 상제께서 먼저 그 사람이 오는 길가의 주막에 가셔서 그를 만나 횡설수설하셔서 그가 스스로 물러가게 하셨도다. 종도들이 이 일을 항상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참에 그 연고를 여쭈니 가라사대 “부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그자에게 살기가 붙어있느니라. 만일 그런 자를 문하에 둔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그 앞길을 맑게 해 주어야 할 터이니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공사에 막대한 지장이 오느니라. 그런 자 중에도 나를 알아보고 굳이 따르겠다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할 수 없이 허락할 뿐이니라” 하셨도다.
행록 4장 49절
 상제께서 김 자현의 집에 계실 때 상제께서 자현을 불러 가라사대 「네가 공신의 집에서 여러 날을 숙식하였으니 공신을 네 집에 데려다가 잘 대접하라」 하시니라. 자현이 깜박 잊고 대접할 기회를 놓치니라. 상제께서 그에게「잘못된 일이라, 이 뒤로는 대접하려고 하여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니라. 그 후 그들 두 사람은 과연 서로 만나지 못하였도다.
행록 4장 50절
 공우가 항상 술을 과음하여 주정이 심하거늘 하루는 상제께서 공우를 불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술을 비교하리라” 하시고, 상제께서 술을 많이 권하시다가 갑자기 “너는 한 잔 술밖에 못된다” 하시니 그 뒤로는 공우가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취하여 더 마시지 못하였도다.
행록 4장 51절
 경석이 손수 가물치를 잡아 회를 쳐서 상제께 올리니 잡수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께서 문밖을 걸으시면서 하늘을 향하여 “생선의 기운이 발하는도다”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도다. 가물치 모양의 구름이 동쪽으로 움직였도다.
행록 4장 52절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
행록 4장 53절
 상제께서 태인 새울에 계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박 공우를 경석에게 보내어 그를 오게 하시니 경석이 와서 뵙느니라. 상제께서 그에게 돈을 주시며 “돌아가서 쌀을 팔아 놓아라” 명하시니라. 그는 그 돈을 사사로이 써 버렸도다. 그 뒤에 상제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부인에게 “쌀을 많이 팔았느냐”고 물으시니 부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경석을 불러 물으시니 경석은 그 돈을 부인에게 드리지 않았음을 고백하였도다. 이후로부터 상제께서 모든 일을 경석에게 부탁하지 아니하고 바로 고부인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셨도다.
행록 4장 54절
 상제께서 하루는 경석에게 검은색 두루마기 한 벌을 가져오라 하시고 내의를 다 벗고 두루마기만 입으신 후에 긴 수건으로 허리를 매고 여러 사람에게 “일본 사람과 같으냐”고 물으시니 모두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 사람과 꼭 같사옵나이다” 하노라. 상제께서 그 의복을 다시 벗고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이웃 아이와 먹으로 장난을 하다가 그 아이가 나에게 지고 울며 돌아가서는 다시 그 서당에 오지 않고 다른 서당에 가서 글을 읽다가 얼마 후 병들어 죽었도다. 그 신이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해원을 구하므로 그럼 어찌 하여야 하겠느냐 물은즉 그 신명이 나에게 왜복을 입으라 하므로 내가 그 신명을 위로하고자 입은 것이니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55절
 김 광찬(金光贊)이 어느 날 개벽공사가 속히 결정되지 않으므로 모든 일에 불평을 털어놓고 “나는 자살하겠노라”고 말하여 좌석을 흐리게 하니라. 상제께서 좌중을 보시고 “모든 일에 때가 있나니 마음을 돌려 어리석음을 벗으라. 너희는 죽는 일을 장차 나에게서 보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4장 56절
 상제께서 광찬이 불만을 품은 것을 심히 괴롭게 여기셔서 형렬에게 이르시니라. “광찬이 자살하려는 것은 제가 죽으려는 것이 아니요 나를 죽으라는 것이니라. 내가 정읍으로 가리니 이 길이 길행이라. 뒷일은 네게 통지하리라.” 二十八일에 상제께서 공우(公又)를 데리시고 동곡을 떠나 정읍 경석의 집에 가셨도다.
행록 4장 57절
 상제께서 경석에게 이르시니라. “네가 모든 일에 귀찮고 뜻에 맞지 아니하니 내가 이 세상을 버릴 수밖에 없다. 세상을 떠나기는 극히 쉬운 일이라. 몸에 있는 정기를 흩으면 불티가 사라지듯이 되나니라.” 그리고 바로 베개를 베고 누우시니 경석이 놀라면서 말하되 “어찌 하시는 일이오니까. 비록 불초하오나 모든 일을 명하심을 좇아 수화라도 피치 아니하겠나이다. 걱정을 푸시옵소서” 하고 맹서하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능히 내 명을 좇을 수 있느냐” 하시며 재삼 다짐을 받으시고 일어나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