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전경

행록 3장 1절
 해는 바뀌어 갑진(甲辰)년이 되었도다. 상제께서 정월 보름에 곤히 주무시는데 갑자기 장 흥해(張興海)의 부친이 상제를 찾아 손자의 빈사를 아뢰고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는지라. 상제께서 혼몽 중에 “냉수나 먹여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집에 돌아가서 앓는 손자에게 냉수를 먹였느니라. 얼마 있지 않아 그 아이가 숨을 거두었도다.
행록 3장 2절
 흥해의 부친은 본래 성질이 사나워서 부중 사람들로부터 천둥의 별명을 얻었느니라. 그는 손자의 죽음에 분통이 나서 상제를 원망하니라. “이것은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이 분명하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아무리 위독한 병이라도 말 한 마디로 고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도다. 내 손자를 고의로 죽이지 않았다면 물은 고사하고 흙을 먹였을지라도 그 신통한 도술로 능히 낫게 하였으리라.” 그는 분노에 못 이겨 몽둥이를 들고 와서 상제를 난타하니 상제께서 유혈이 낭자하니라. 그제서야 상제께서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일어나려고 하시니라. 이때 그는 살인범이라고 소리치며 상제를 결박하여 장방(長房)으로 끌고 가다가 갑자기 결박을 풀면서 “이것이 다 나의 잘못이니다. 어린애가 급병으로 죽은 것을 어찌 선생님을 원망하리오” 뉘우치듯이 말하고 옛정으로 돌아가시기를 원하며 자기 집으로 동행하시자고 권하는지라. 상제께서 듣지 않으시고 서 원규(徐元奎)의 집에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시고 이튿날에 전주(全州) 이동면(伊東面) 이 직부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장 3절
 흥해의 부친이 상제를 장방으로 끌고 가다가 돌려보낸 것은 상제께서 백 남신으로부터 받으신 돈 증서를 가지고 계심을 알고 돈을 청구하려는 속심에서였도다. 상제께서 그 속심을 간파하시고 흥해의 집으로 따라가지 않으셨도다.
행록 3장 4절
 다음날에 흥해의 부친은 상제를 서 원규의 집에서 찾았으되 허탕을 치니라. 그는 또 화가 치밀어 상제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고 마구 지껄이면서 상제가 계실 만한 곳을 여기저기 찾으니라. 그는 상제를 찾다 못 찾으니 상제의 식구들을 전주군 난전면 화정리에서 찾고 행패를 부렸도다. 이때 상제의 가족은 이곳에 있는 이 경오(李京五)의 좁은 방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도다.
행록 3장 5절
 김 형렬은 흥해의 부친의 행패를 전혀 모르고 상제의 소식을 듣고자 화정리에 왔도다. 그를 흥해의 가족들이 결박하여 서 원규의 집에 끌고 가서 상제가 계신 곳을 대라고 족치는지라. 서 원규ㆍ김 형렬은 상제께서 가신 곳을 몰라 그 가족들로부터 구타만 당하였도다.
행록 3장 6절
 이로 인하여 상제의 가족은 화를 피하여 태인 굴치로 가고 형렬은 밤중에 피하고 원규는 매일 그들의 행패에 견디다 못 견디어 약국을 폐쇄하고 가족과 함께 익산(益山)으로 피하였도다.
행록 3장 7절
 상제께서는 장 흥해의 변에 제하여 부친의 소실인 천원 장씨(川原張氏)에게 “술을 빚으라” 이르시고 “누구든지 술을 먼저 맛보지 말라”고 당부하시니라. 어느 날 상제의 부친이 오시자 장씨는 상제께서 하신 말씀을 잊고 웃술을 먼저 떠서 드리니라. 얼마 후에 상제께서 돌아오셔서 술에 먼저 손댄 것을 꾸짖으시고 “가족들이 급히 피하여야 화를 면하리라” 말씀하시고 나가셨도다. 흥해 가족들이 달려와 장씨에게 상제의 모친이냐고 추궁하자 장씨가 당황하여 “내가 바로 모친이라” 하니 흥해 가족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강제로 모친을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수없이 구타하니 이때에 낯모르는 백발노인이 옆에 서 있다가 말하는도다. “자식의 잘못으로 부모에게 폭행한다는 것이 사람으로 할 짓이냐”고 꾸짖자 그제야 흥해 부자가 물러가니라. 그들이 떠나간 후 겨우 장씨는 정신을 되찾고 집에 돌아왔느니라. 얼마간 지나서 상제께서 장씨에게 들러 그 시말 이야기를 들으시고 “생지황(生地黃)의 즙을 내어 상처에 바르라”고 말씀하시니 장씨가 그대로 행하니 그날로 몸이 회복되었도다.
행록 3장 8절
 어느 날 종도들이 상제를 뵈옵고 “상제의 권능으로 어찌 장 효순의 난을 당하셨나이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교중(敎中)이나 가중(家中)에 분쟁이 일어나면 신정(神政)이 문란하여지나니 그것을 그대로 두면 세상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기운을 받아서 재앙을 해소하였노라”고 이르셨도다.
행록 3장 9절
 상제께서 갑진년 정월에 장 효순 화난을 겪으시고 직부의 집에 가셔서 월여를 머무시다가 다시 형렬의 안내로 원평(院坪) 김 성보(金聖甫)의 집에 머무시게 되었도다. 그때 정 남기와 그의 처남이 일진회원으로서 상제의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께 달려들어 상투를 가위로 깎으려고 하되 베어도 베어지지 않으니 상제께서 친히 한 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10절
 화적(불한당)이 갑진(甲辰)년에 대낮에도 횡행하였도다. 이해 二월에 상제께서 갑칠(甲七)을 데리시고 부안(扶安)을 거쳐 고부(古阜) 거문바위 주막에 이르시니 그 주막에 화적을 잡기 위해 변복한 순검 한 사람이 야순하다가 쉬고 있었도다. 상제께서 주모에게 “저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니 주식을 주지 말라. 주식을 주었다가 죽으면 대금을 받지 못하니 손해가 아니냐”고 일러 주시니라. 이 말씀을 그 순검이 듣고 몹시 분격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면서 상제를 구타하니라. 그래도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죽을 사람으로부터 맞았다 하여 무엇이 아프리오” 말씀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셨도다. 주모가 그에게 “저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인이시니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물어보시라”고 말하는지라. 순검이 곧 상제의 뒤를 따라가서 사과하고 연고를 여쭈어 물으니라. 가라사대 “오늘 밤에 순시를 피하고 다른 곳으로 빨리 가라” 하시니 순검은 명을 좇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니라. 얼마 후에 화적 여럿이 몰려 와서 주모를 난타하며 순검의 거처를 대라고 졸랐도다. 화적들은 순검을 죽이려고 미리 작정하고 습격한 것이어서 이튿날 그 순검이 상제께 배알하고 재생의 은혜에 흐느껴 울었도다.
행록 3장 11절
 이달에 상제께서 볼일이 계셔서 태인(泰仁) 신배(新培)의 동리에 들어서시니 불이 나는도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점점 강해져 온 동리를 삼킬 듯하니라. 도저히 끌 수 없으리라 판단하시고 상제께서 “불을 피워 동리를 구하리라” 말씀하시고 형렬을 시켜 섶나무로 불을 마주 피우게 하시니 불이 곧 꺼졌도다.
행록 3장 12절
 이해 五월에 백 남신을 체포하라는 공문이 서울로부터 전주부에 전달되니 남신이 당황하자 김 병욱이 남신에게 작년 겨울에 자기가 화난을 당하였을 때 상제의 도움으로 화난을 면하였음을 알리니 그는 병욱을 통해 상제의 도움을 청하였도다. 상제께서 “부자는 돈을 써야 하나니 돈 十만 냥의 증서를 가져오라” 하시니라. 병욱이 곧 남신으로부터 十만 냥의 증서를 받아 가지고 이것을 상제께 올렸도다. 그 후에 남신은 화난에서 풀리면서 남(南) 삼도(三道)의 세무관이 되어 몇만 냥의 돈을 모았고 상제께서는 그 후에 증서를 불사르셨도다.
행록 3장 13절
 상제께서 이해 六월에 김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그는 상제의 말씀을 좇아 전주로 가서 김 병욱을 만나고 상제와 만날 날짜를 정하고 돌아오니라. 그가 돌아오는 길에 장 흥해의 부친 장 효순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라. 형렬은 모든 것을 상제께 아뢰면서 “장 효순은 진작 우리의 손에 죽었어야 마땅하거늘 저절로 죽었으니 어찌 천도가 공정하다 하오리까”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들으시고 “이 무슨 말이냐 죽은 자는 불쌍하니라”고 꾸짖으셨도다. 그 이튿날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이 있으심에도 전주부로 가시지 않고 형렬을 이끌고 고부로 향하시는지라. 형렬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상제께서 병욱과의 약속을 어기시는 이유를 여쭈었으나 상제께서 웃으시며 대답을 하시지 않았도다.
행록 3장 14절
 일진회와 아전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화정리의 이 경오(李京五)를 찾아 돈 七十냥을 청구하시니 그가 돈이 없다고 거절하였도다. 부득이 다른 곳에서 돈 일곱 냥을 구하여 가지시고 “이 돈이 능히 七十냥을 대신하리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형렬을 대동하시고 용머리 주막에 돌아오셔서 많은 사람을 청하여 술을 권하여 나누시고 난 후에 종이에 글을 쓰고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의 문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니라.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엿 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百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 하셨도다.
행록 3장 15절
 이후에도 얼마간 상제께서 그 주막에 머무르셨도다. 밤마다 부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진회원을 색출하는지라. 상제께서 일진회원에게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관부의 조사를 면케 하리라” 말씀하시니 이로부터 그렇게 엄격하던 취체가 풀렸도다.
행록 3장 16절
 이와 같이 범사가 풀린 후에 상제께서 경오에게 “내가 그대에게 돈 七十냥이 있음을 알고 청구한 것인바 왜 그렇게 속이느뇨”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정색하여 “참으로 없었나이다”고 여쭈니라. 그 이튿날 경오의 집에 화적이 들어 그 돈을 모두 잃었도다. 그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 돈에 척신이 범함을 알고 창생을 건지려고 청한 것이어늘 그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행록 3장 17절
 어느 날 상제께서 문 공신(文公信)에게 돈 서른 냥을 지니게 하시고 피노리를 떠나 태인 행단(杏壇) 앞에 이르셨도다. 주막에 들러 술을 찾으시니 주모가 술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이런 주막에 어찌 술이 없으리오”라고 하시니 주모가 “물을 붓지 아니한 새 독의 술이 있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술은 새 독의 술이 좋으니라. 술에 안주가 있어야 하리니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 분부하시고 글을 써서 주모에게 주어 돼지막 앞에서 불사르라고 이르시니 주모가 그대로 행한바 돼지가 스스로 죽으니라. 또 상제께서 주모에게 “돼지를 삶아 먼저 맛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죽으리라” 분부하셨도다. 상제께서 삶은 돼지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술을 전주로 걸러서 마루 위에 놓게 하시고 글을 써서 주인을 시켜 뜰 한가운데서 불사르게 하신 후에 공신과 주인과 참관한 마을 사람과 행인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잡수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 자에 하나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도다.
행록 3장 18절
 그 이튿날 아침에 공신이 술과 고기 값으로 서른석 냥을 몽땅 갚은 뒤에 상제께서 공신을 데리고 행단을 떠나 솔밭 속으로 지나시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이놈이 여기에 있도다” 하시는도다. 공신이 놀라서 옆을 보니 동자석(童子石)만이 서 있도다. 그곳에서 원평으로 행하시는 도중에 공신에게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 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오”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그 후에 일진회원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그곳을 지나다가 일본 군사가 의병인 줄 알고 총을 쏘니 스물한 명이 죽었도다.
행록 3장 19절
 금구 수류면 평목점(金溝水流面坪木店)에서 정 괴산(丁槐山)이라는 자가 집안이 가난하여 주막의 술장사로 겨우 호구하면서 매양 상제를 지성껏 공양하더니 상제께서 어느 날 우연히 주막에 들렀을 때 괴산이 상제께 올리려고 개장국질솥에 끓이다가 질솥이 깨어지므로 그의 아내가 낙담하여 울고 섰거늘 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셔서 쇠솥 하나를 갖다 주었더니 이로부터 그의 가세가 날로 늘어났도다. 그 후에 그가 태인 방교(泰仁方橋)로 이사하게 되자 그 쇠솥을 수류면 환평리(環坪里) 정 동조(鄭東朝)에게 팔았더니 이로부터 괴산은 다시 가난하게 되고 정 동조는 도리어 살림이 일어나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솥을 복솥이라 불렀도다.
행록 3장 20절
 상제께서 부안을 거쳐서 고부 입석리 박 창국(朴昌國)의 집에 이르러 수둥다릿병으로 며칠 동안 신고하셨도다. 이때 상제의 누이가 되는 창국의 부인이 맨발로 풀밭에 다니는 것을 보시고 “이 근처에 독사가 있으니 독사가 발을 물면 어찌하느냐”고 걱정하시고 상제께서 길게 휘파람을 부시니 큰 독사 한 마리가 담장 밖의 풀밭에서 뜰 아래로 들어와 머리를 드니라. 이때에 창국이 바깥에서 들어오다가 독사를 보고 크게 놀라서 짚고 있던 상장으로 뱀을 쳐 죽였도다. 이것을 보시고 “독사혜(毒蛇兮) 독사혜(毒蛇兮) 상인견지(喪人見之) 상장타살(喪杖打殺) 도승견지(道僧見之) 선장타살(禪杖打殺). 누이는 상장선장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독사를 제거하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누이가 맨발로 땅에 묻어 있는 피를 밟으면 해를 볼까 봐 손수 그것을 밟아서 독기를 제거하셨도다.
행록 3장 21절
 八월에 김 형렬이 입석리(立石里)에 계시는 상제를 배알하고자 찾았도다. 상제께서 수둥다릿병이 다소 회복되었으므로 형렬의 안내로 하루 이삼십 리씩 걸어서 함열 회선동의 김 보경의 집에 이르셨도다.
행록 3장 22절
 상제께서 언제나 돈 한두 냥을 몸에 지니고 다니셨도다.
행록 3장 23절
 상제께서 김 형렬을 앞세우고 익산군 만중리(益山郡萬中里) 황 사성(黃士成)의 집에 이르러 머무실 때 어떤 사람이 얼굴에 노기를 띠고 문을 홱 닫는 바람에 벽이 무너졌도다. 이것을 보시고 곧 상제께서 같은 동리의 정 춘심(鄭春心)의 집에 옮기시니라. 황 사성의 부자가 춘심의 집으로 상제를 뵈옵고자 와서 전말을 아뢰니라. 황 사성의 부친 숙경이 황 참봉(黃參奉)으로부터 돈을 얻어 썼으나 그는 죽고 그 아들이 사람을 시켜 숙경에게 갚을 것을 독촉하러 온 것인데 그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경무청에 고발하여 옥에서 신세를 썩게 하리라고 위협하고 돌아가는 마당에 상제께 들른 것이외다.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벽을 무너뜨렸으니 그 일은 풀리리라. 삿갓 한 닢과 필목 한 필을 사 오라”고 숙경에게 이르시고 “이것은 양자 사이의 길을 닦는 것이니라”고 알리고 “이후 일이 순조롭게 풀리니 염려하지 말라”고 이르셨도다. 연말에 순검이 채무관계로 숙경을 잡으므로 숙경이 순검에게 채권자의 집에 들러 주시기를 간청하니 순검이 그 채권자의 집에 데리고 가니 참봉의 아들이 숙경이 잡혀온 것을 보고 힐난하거늘 그 아들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저 어른은 너의 부친의 친구이신데 네가 차마 그분을 옥에 가두게 하다니 금수와 같은 행위를 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하면서 아들로부터 증서를 빼앗아 불살랐도다.
행록 3장 24절
 갑진(甲辰)년에 도적이 함열에서 성하였도다.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거니와 김 보경도 자기 집이 부자라는 헛소문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느니라. 이해 九월 중순경에 상제께서 함열 회선동 김 보경의 집에 오셨도다. 보경이 “도적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오니 어찌 하오리까”고 근심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며 보경의 집 문 앞에 침을 뱉으시니라. 상제께서 떠나신 후로 도적이 들지 않았도다.
행록 3장 25절
 갑진년 十一월에 전주에 민요가 일어나서 인심이 흉흉하니라. 이 소란 중에 상제께서 전주에 이르셨도다. 김 보경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김 병욱이 국가의 중진에 있으니 민심의 동요를 진무하여 그 천직을 다하여야 할 일이거늘 그 방책이 어떤 것인지” 하시고 궁금히 여기시니 보경이 병욱에게 이것을 전하였느니라. 병욱은 “나의 힘으로 물 끓듯 하는 민요를 진무할 수 없으니 상제의 처분만을 바라옵니다”고 말씀드렸도다. 상제께서 보경으로부터 사정을 알아차리시고 웃으시기만 하시니라.
 이날 밤에 눈비가 내리고 몹시 추워져 노영(露營)에 모였던 민중은 내리는 눈비와 추위에 견디지 못해 해산하고 사흘 동안 추위와 눈비가 계속 내리므로 민중이 다시 모이지 못하니 민요는 스스로 가라앉았도다.
행록 3장 26절
 상제께서 섣달에 원평에 와 계셨을 때에 박 제빈(朴齊斌)이 전라도 전주에 출두하고 군수 권 직상(權稷相)이 파직될 것이란 소문이 떠돌므로 김 병욱도 전주 군장교에 있는 신분으로서 일이 어찌 될까 염려하여 상제를 찾아뵈옵고 걱정하니 상제께서 “근심하지 말라 무사하리라”고 일러 주셨도다. 며칠 후에 박 어사가 전주부에 들어섰으나 그의 면관비훈이 전주부에 내려오므로 상제의 말씀대로 일은 무사하였도다.
행록 3장 27절
 상제께서 을사년 김 보경의 집에서 종도들에게 소시에 지은 글을 외워 주셨도다.
 運來重石何山遠 粧得尺椎古木秋
 霜心玄圃寒菊 石骨靑山瘦落秋
 千里湖程孤棹遠 萬方春氣一筐圓
 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
 風霜閱歷誰知己 湖海浮遊我得顔
 驅情萬里山河友 供德千門日月妻
또 하나를 외우셨도다.
 四五世無顯官先靈生幼學死學生
 二三十不功名子孫入書房出碩士
행록 3장 28절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봄 어느 날 문 공신에게 “강 태공(姜太公)은 七十二둔을 하고 음양둔을 못하였으나 나는 음양둔까지 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29절
 상제께서 금산면 용화동(金山面龍華洞)의 주막에 들르셔서 술을 잡수시려고 하였으나 술이 없었기에 술을 빚었던 항아리에 물을 부으시고 손으로 저으신 후에 마시고 또 종도들에게도 나눠 주시니 그 맛이 꼭 본래의 술 맛과 다름이 없었느니라. 이 일은 병오년 정월에 있었도다.
행록 3장 30절
 김 갑칠이 친산면례하려고 모든 기구를 준비하였더니 상제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례하여 주리라” 하시고 준비한 모든 물품을 불사르시고 난 뒤에 “그 재를 앞 내에 버리고 하늘을 쳐다보라” 하시니 갑칠은 이상한 기운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치는 것을 보았도다.
행록 3장 31절
 상제께서 어느 날 류 찬명(柳贊明)과 김 자현(金自賢) 두 종도를 앞에 세우고 각각 十만 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 병욱의 을 태을주로 풀고 장 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2절
 상제의 부친께서 이해 七월 초에 동곡에 가서 상제를 찾으니라. 부친은 형렬의 안내로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 김 성화(金性化)의 집에 인도되었으나 며칠 전에 군항(群港)으로 떠나 상제께서 계시지 않았으므로 다시 뒤를 쫓아 군항에서 상제를 뵈옵게 되었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군항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오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튿날에 집으로 되돌아가고 상제께서는 군항에 월여를 머무시다가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장 33절
 상제께서 병오(丙午)년 十월 어느 날 예수교당에 가셔서 모든 의식과 교의문견하시고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4절
 상제께 김 형렬이 “많은 사람이 상제를 광인이라 하나이다”고 고하니라.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거짓으로 행세한 지난날에 세상 사람이 나를 신인이라 하더니 참으로 행하는 오늘날에는 도리어 광인이라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35절
 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 “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행록 3장 36절
 상제께서 이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시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 하시니 그는 말씀에 좇아 술을 올렸도다.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나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르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요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행록 3장 37절
 정읍(井邑) 사람 차 경석(車京石)이 정미년 五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때 상제께서도 김 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 하니 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네시고 술을 드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지언정 어찌 살기를 띠리오” 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 경석은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날이 저물어 상제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쫓으니라. 닿은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아집이니라. 경석은 그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워하였도다.
행록 3장 38절
 경석이 그 물방아집에서 열흘 동안 묵으면서 상제께 정읍으로 가시기를 간청하였으되 상제께서 응하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노하시고 때로는 능욕하시기도 하고 구축도 하여 보셨느니라. 그래도 경석은 끝끝내 떠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서 “그럼 네가 나를 꼭 따르려거든 모든 일을 전폐하고 내가 하라는 일에만 전력하여야 할지니 너의 집에 가서 모든 일을 정리하고 六월 초하루에 다시 이곳으로 오라. 그러면 함께 가리라”고 이르시니 그는 곧 돌아가서 가사를 대략 정리하고 그 날짜에 용암리에 다시 와서 상제께 배알하고 정읍으로 가시기를 또 청하는도다. 상제께서 불응하시다가 사흘 후에 허락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이 잠기는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헤엄쳐서 겨우 발목이 닿는 물에 이르렀는데 이제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려 하는도다”고 하셨도다.
행록 3장 39절
 훗날에 상제께서 경석을 보시고 “너는 강령을 받아야 하리라” 하시고 “원황정기 내합아신(元皇正氣來合我身)”의 글귀를 읽게 하신 후에 문을 조금 열으시니 경석이 그 글을 읽다가 갑자기 방성대곡하는지라. 상제께서 일각쯤 지나서 울음을 그치게 하셨도다.
행록 3장 40절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明月千江心共照 長風八隅氣同驅
라고 하셨도다.
행록 3장 41절
 상제께서 그 후 경석에게 “너의 선묘인 구월산(九月山) 금반사치(金盤死雉)의 혈음(穴蔭)을 옮겨 와야 되리라”고 명하시고 공우에게 북을 치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 혈음은 반드시 장풍(長風)을 받아야 발하리라” 하셨도다. 이때 이 도삼(李道三)의 아우 장풍(長豊)이 문득 들어오거늘 공우가 북채를 잠깐 멈추고 “장풍이 오느냐”고 인사를 하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이제 그만 그치라”고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42절
 상제께서 어느 날 이 도삼에게 글 석 자를 부르게 하시니 그가 천ㆍ지ㆍ인(天地人) 석 자를 불렀더니 상제께서
 天上無知天 地下無知地
 人中無知人 何處歸
라고 그에게 읊어 주시니라.
행록 3장 43절
 어느 때 고양이를 보시고
 嘴力未穩全信母 卵心常在不驚人
 身來城國三千里 眼辨西天十二時
라고 지으셨도다.
행록 3장 44절
 六월 어느 날 신 경원(辛京元)이 태인에서 사람을 급히 보내어 순검이 날마다 저의 집에 와서 상제의 계신 곳을 묻는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였도다. 상제께서 그 사람을 보고 “급한 일로 오는 사람이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늦어진 것은 무슨 일이뇨” 꾸짖으시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오는 길에 당화주역으로 운명을 비판하는 자가 있으므로 잠깐 지체되었사오니 용서하소서” 하니 상제께서 곧 글을 써 주시며 “이 글을 경원에게 주고 보고 난 후에 곧 불사르라” 이르시니 그 글은 이러하니라.
 天用雨露之薄則必有萬方之怨
 地用水土之薄則必有萬物之怨
 人用德化之薄則必有萬事之怨
 天用地用人用統在於心

 心也者鬼神之樞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행록 3장 45절
 상제께서 태인 김 경현(金京玄)의 집에 여러 날 머무르시다가 평상시와 달리 좁은 길로 그곳을 떠나셨도다. 읍내 무뢰한들이 모여서 강 증산(姜甑山)은 요술로써 사람을 속이니 우리가 혼을 내어주자고 음모하고 상제께서 떠나실 때를 기다려 습격하려고 길가에 매복하였으나 상제께서는 미리 아시고 다른 좁은 길을 택하신 것이로다.
행록 3장 46절
 김 덕찬(金德贊)의 누이동생 집에서 묘제가 있었던바 덕찬이 상제께 매가에 가셔서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상제께서 “나의 술을 먼저 마시라” 하시니 그가 “무슨 술이옵나이까”고 여쭈니 “좀 기다려 보라” 하시니라. 얼마 후에 공우가 삶은 닭과 술을 가져와서 상제께 드리니 이에 덕찬이 감복하여 술을 마셨도다.
행록 3장 47절
 상제께서 정미년 十월 어느 날 경석에게 돈 三十냥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 하시면서 어떤 법을 베푸시고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活計經千卷 行裝屋數間 小臣求聞道 非偸半日閑
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도다.
행록 3장 48절
 상제께서 김 형렬을 보고
 弊衣多垢勝金甲 頹屋無垣似鐵城
을 외워 주셨도다.
행록 3장 49절
 또 상제께서 이해 겨울에 그에게 잘 기억해 두라고 이르시면서 시를 외우셨도다.
 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癡
 急地尙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皆好男兒
행록 3장 50절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맹자(孟子) 한 절을 일러 주시면서 그 책에 더 볼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셨도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贐行 拂亂其所爲 是
 故 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행록 3장 51절
 상제께서 이해 섣달에 고부 와룡리에 계시면서 문 공신과 신 경수의 두 집에 왕래하셨도다. 하순에 형렬이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입고 계시던 의복을 내어 주시면서 집에 돌아가 빨아서 자현과 함께 다시 오라고 이르셨도다. 그는 말씀대로 행하여 상제를 배알하고 의복을 올렸도다.
행록 3장 52절
 상제께서 형렬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자현과 함께 문 공신의 집에 있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 나는 신 경수에게 가 있으리니 관리가 나의 거처를 묻거든 숨기지 말고 실토하라.” 좌중의 종도들이 영문을 모르고 이상히 여기는도다. 이것을 아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관리를 두려워하면 제각기 흩어져서 마음대로 돌아가라” 하시니 저희들이 더욱 의심하는도다.
행록 3장 53절
 이때가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를 보시는 때이었도다. 때마침 면장과 이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면장에게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뇨” 하시니 이 말을 듣고 놀라 두말없이 돌아가서 관부에 고발하였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고운 일광단(日光緞)으로 옷을 지어 새로 갈아입으셨도다.
행록 3장 54절
 상제께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에 따라 화난이 닥칠 것을 종도들에게 알리셨도다. “정미년 十二월 二十四일 밤 새벽에 백 순검이 오리라”고 종도들에게 알리시니 저희들은 순검 백 명이 닥치리라 생각하고 흩어지는 종도들이 있었으나 태인 새울 백 낙규(白樂圭)의 형인 백 순검이 새벽녘에 다녀갔도다.
행록 3장 55절
 二十五일 밤중에 무장한 순검 수십 명이 갑자기 공신의 집을 포위하고 좌중에 있던 사람을 결박하고 상제의 거처를 묻기에 신 경수의 집에 계시는 것을 말하니 순검들이 곧 달려갔도다. 그들은 방문에 총대로 구멍을 뚫고 위협하느니라. 상제께서 방안에서 총대를 잡으시고 호령하시니 저희들이 겁을 먹고 총대를 빼려고 잡아당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도다. 잠시 있다가 상제께서 들어오라고 허락하시니 비로소 저희들이 방에 들어오더니 상제를 비롯하여 종도 二十여 명을 포박하였도다. 이튿날 상제와 종도들은 고부 경무청에 압송되었나니 이것은 의병의 혐의를 받은 것이로되 백의장군 공사에 따른 화난이라고 훗날에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56절
 상제와 종도들은 정우면 와룡리(淨雨面臥龍里)에서 포박되어 상제를 선두로 하여 덕천면 용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상제께서 한 마리를 잡게 하고 종도들이나 순검들과 함께 잡수시고 고부로 행하셨도다.
행록 3장 57절
 이 일이 나기 전날 상제께서 광찬을 정읍에 있는 경석에게 보내고 원일을 태인에 있는 경원에게 가게 하고 공우를 또 다른 곳으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피하게 하신 것은 광찬과 원일의 성질을 알고 계시는 터이고 공우는 여러 번 관재를 당하였던 까닭이었도다.
행록 3장 58절
 이튿날부터 고부 경무청은 심문을 시작하였느니라. 상제께 경무관이 “네가 의병이냐”는 물음에 가라사대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이 말씀에 경무관이 놀라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에 상제께서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이르시니라. 경무관은 상제의 머리를 풀어헤쳐 보기도 하고 달아매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한 뒤에 옥중에 가두고 다른 사람은 문초도 받지 않고 옥에 갇혔도다. 여러 사람들이 상제를 원망하기 그지없었도다.
 때마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병과 충돌하였도다. 의병을 가장하여 노략질하는 비도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혐의로 체포된 자는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었으니 모든 종도들이 의병의 혐의에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떨고 있었도다.
행록 3장 59절
 문 공신은 순검들에게 옆구리를 발로 채여 심한 오한을 일으켜 식음을 전폐하여 위독하게 되었는지라. 상제께서 “급한 병이니 인곽을 써야 하리라” 하시고 여러 종도들을 관처럼 둘러 세우시고 상제께서 소변 찌끼를 받아 먼저 조금 잡수시고 공신으로 하여금 먹게 하시니라. 공신은 자기를 위하여 상제께서 잡수심을 황공히 생각하여 받아 마시니 조금 후에 그는 숨을 돌리기 시작하여 평상대로 회복하였도다.
행록 3장 60절
 간수 중에 형렬ㆍ자현과 친한 사람이 있어 그들은 다른 조용한 감방으로 옮겨 주거늘 형렬이 간수에게 부탁하여 상제께서도 같은 방으로 옮기시게 하였도다.
행록 3장 61절
 상제께서 감방을 옮기신 후에 형렬ㆍ자현에게 가라사대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 하시고 또 자현에게 가만히 가라사대 “비록 몇십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 하시니라. 그믐날 밤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이것은 서양에서 신명이 넘어옴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옥중에서 과세하셨느니라.
행록 3장 62절
 무신년 원조경무관이 죄수에게 주식을 한 상씩 나누어 주기에 모든 종도는 “주식을 나누어 주니 이제 죽이려는 것이로다. 우리는 상제를 따르다가 결국 죽게 되는도다”고 한층 더 상제를 원망하였도다.
행록 3장 63절
 이날에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가 냉혹하였도다. “이것은 대공사를 처결한 까닭이노라” 하시니라. 경무관이 여러 사람을 취조하여도 아무 증거가 없으므로 상제를 광인으로 취급하여 옥중에 남기고 정월 十일에 옥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석방하였도다.
행록 3장 64절
 출옥한 종도들은 제각기 집에 돌아갔으나 경석은 고부에 와서 상제의 출옥을 二월 四일 경칩일(驚蟄日)까지 기다려 상제를 맞이하여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형렬은 상제께서 출옥하심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동곡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5절
 화난이 있은 후 어느 날 상제께서 문 공신의 집에 가시니 공신이 불쾌한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느니라.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대를 갚으라는 독촉을 하였는데 생각컨대 고부화액 때 가지고 갔던 백목과 돈을 흩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음식 값을 갚지 아니하셨나이까.” 상제께서 묵묵히 들으시고 가라사대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 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 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 하시니 공신이 잠잠히 듣고만 있다가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 진대 그만두사이다” 하니라. 상제께서는 동곡으로 돌아가셨도다.
행록 3장 66절
 고부화액 때 체포되었던 二十여 명의 종도 중에 김 형렬ㆍ김 자현 두 사람밖에 남지 않고 다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도다.